<하나와 앨리스>
확실히 모니터보다 TV의 색감과 화질이 나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DVD에 맛을 들인 후부터는 영화는 내려받기로 보지 않게 되버렸다. 물론 DVD로도 구하기 힘든 작품이라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좋은 자막 제작자를 만나지 못해 반 이상은 "....." 으로 처리된 조악한 녀석으로 본지라 DVD가 나온 김에 다시 보게 되었다. 특히나 서플먼트중 제작일기가 마음에 들었는데, 이와이 슌지 감독의 얼굴을 제대로 본것은 여기에서 였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아오이 유우 와 함께 온다고 했을때 어찌나 가보고 싶던지, 물론 학업에 치여 꿈만 꾸고 말았었지만. 스즈키 안 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부담스러운 외모로 성장해가고 있다. 이 처자도 아마 혼혈이 아닐까 생각되는 외모인데 처음 보았던 김전일(2000)에서는 그러한 느낌이 적었는데 말이지. 20대가 되면 또 달라진 모습이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서플먼트 혹은 스페셜 피쳐가 잘 꾸며져 있으니까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한번 혹은 다시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된다.
<내셔널 트레저>
이야기의 흐름 자체는 배신-경쟁-승리로 이어지는 뻔한 것이지만, 오직 다이안 크루거 누님의 미모에 이끌려 영화를 선택했다는 것이 반쯤은 확실한 사실이다. 트로이에서는 살을 불려 나왔으니 번외로 치고 이번 작품에서는 시종일관 눈길을 계속 주고 있었다. 물론 조명과 화장에 의해 달라지는 모습을 선보이기는 하였으나 매력적인것은 틀림없는 사실. 그나저나 숀 빈 아저씨는 최근 줄창 악당역 혹은 다크 포스를 풍기는 역할만 하고 있다. 007부터 인지하기 시작해서, 반지의 보로미르, 이퀼리브리엄 그리고 트로이의 오디세우스까지. 최근 개봉한 아일랜드까지. 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영화전문가가 이에 대해 지적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엔키노의 듀나가 쓴 이 부분 이다. 아무튼 DVD의 서플먼트도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으니 집어들어도 후회는 없을거라 생각된다. 숨겨진 것들을 찾는 재미도 있었고.
<혈의누>
극장에서 볼거라 다짐했었지만, 결국 우유부단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귀차니즘으로 인해 DVD를 이용해야 했던 나에게만 비운의 작품. 20분도 넘어가지 않아 범인이 누군지 감이 와서 'who?' 보다는 'why?' 에 초점을 두고 봐야했었다. 뭐, 이건 나뿐만 아니라 영화를 본 대부분이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또한 차승원이 수사관에 조금 어울리지 않았다는 느낌. 단지 이미지 일터이지만, 그렇게 진지하게 연기를 하다 갑자기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트리지 않을까 하는 이상스런 느낌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다. 결국 한번도 웃지 않았지만. 더군다나 초기 발매판이어서 그런건지 실수로 뭔가를 두고 왔었는지 서플먼트가 전혀 없었다. 국내에도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한 여러종류의 장르들이 시도되었으면 좋으련만. 늘 동시대나 약간의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만 나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연히 본인이 역사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셀룰러 폰과 기관총과 비행기가 나오지 않는다면 더욱 좋다.
몇 주 혹은 얼마 전에 본 작품들이지만, 딱히 감상이 떠오르지 않아 천천히 두들겼다. 이제 또 뭘 보고 사나. 이 더운 여름에.
DAUM 카페에 갔다가 한동안 'new'의 빨간 불이 들어온적이 없는 '정컴99카페' 에 들르게 되었다. 1년전 이때만 하더라도 어느정도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황폐해져 그저 기록의 보관소로서 그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냥 죽 둘러보다 자신이 쓴 글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읽는동안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치졸함과 어리광에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였다. 언젠가는 저곳도 없어질수도 있고, 또한 나의 자괴감을 후일 그릇된 방향을 바로잡는 척도로 삼기 위해 그곳에 내가 두드렸던 헛소리들을 일부 옮겨온다. - 너무 엄청난 헛소리들은 그냥 그곳에서 사장시키기로 했다. 뻔뻔함에도 정도가 있기 때문에.
*2월 5일 13시37분
2월. 한국교육제도의 특성상 대부분 - 아니 거의 모든 - 의 학업일정은
3월에 시작하게 되고 그에 맞게 십수년을 길들여져 오다보니,
이 2003년 2월도 아직은 2002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
또한 이 백수짓도 벌써 두 주째.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지 못한
시간들은 꿈결같이 흘러가 버렸다. 자신감 결여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어느덧 슬금슬금 커져가고 있는지도.
하지만 비틀즈도 지껄이지 않았던가. 오블라디 오블라다.
쳇. 인생이 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목적은 뭐람.
누군가의 말대로 살기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일지도. 아, 헛소리 길게 하는 군.
- 전역 후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던 시기의 참담함이 드러나있다.
*2월 9일 22시38분
지금 시간은 윈 2000 으로 10시 35분 핸드폰 위성수신으로 10시 32분.
그러나 이제는 잠들어야 할 시간. - 아직 저녁인데.
궁극 PC폐인의 길을 걸을 때에는 그날 아침의 시작과 함께 잠들어
끝나갈 무렵에 일어나고는 했으나, 과도한 금전에 대한 욕구를
이기지 못해 직업전선에 뛰어 듬으로서 10시 30분에 잠들어야 하는
어이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마도 2월 동안은 이러한 패턴이
계속될터. 안녕 나의 폐인 동지들. 다시 만날 그날까지.
이름은 적지 않겠지만, 윤모군. 이모군. 이모군. 안모군.
그럼, 이만 나는 에테르의 세계로.
- 공사장에서 막노동에 투신해 있을 무렵. 줄어든 PC사용시간에 대한 한탄.
*2월12일 22시58분
글을 두드려야 겠다고 마음 먹게 된것은 작은 동산에서부터 펼쳐진 시골마을의 풍경에 압도당한 후였다. 우연찮게 노동의 한 갈래로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지만, 그 전원적 풍경의 예라고 할 수 있을만큼의 한가로움이란.
늘씬한 소나무 숲을 따라 길을 걷는 그 아름다운 광경에서도 나는 몇 분전 들었던 '일당 4만원'에 날수를 셈하며 멍청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각의 효과를 압도하는 망상의 깊이에는 누구도 당할 자 없으리 - 금전의 위력이란! - 이렇게
오늘도 조금씩 순수를 잃고 나는 하루 나이를 먹어 가는 게다.
오늘은 2003년의 43번째 날. 그만큼 나도 당신들도 걸어 오고 말았다.
"나와 함께 나이를 먹자!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나니."
- 브라우닝 -
- 금전에 맛을 들이던 시절. 옛날의 글쓰기 버릇이 조금 드러나있다.
*2월15일 21시48분
장시간의 노동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800원이나 하는 교통비와 집까지 가는 거리를 생각하며
잠깐 망설였지만, 그 거리를 가득 메운 퇴근시간대의 차량들을
보고는 마음을 굳혀 걸어가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그 상쾌한 마음도 잠시. 못에 찔린 발이 쑤셔오면서,
그리고 갑자기 소통이 원활해진 도로 상황을 보고 상당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취침시간까지의 한정된 다섯 시간 속에서 -20여분을 800원과
교환하는 것이 과연 쓸만한 일인가. 하지만 얼마 걷지 못해서
고교시절 같이 주사위를 굴리던 동료와 마주치고 말았다.
서로 입대후 연락이 이어지지 못했었기에 그 반가움은 이루 글로
옮길 수가 없음이다. - 음지에 서식했던 인간들의 동종의식이랄까.
아무튼 그 만남으로서 내 마음 속의 저울은 이내 기울어지고 말았다.
아아, 그리고 나는 오늘 또한 한가지의 신념을 실현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왼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는 더욱 더 정면을 - 심지어는 오른쪽을
쳐다 볼테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탑승구를 정확히 정류장에 맞추어 주면
더욱 좋으련만. 나는 내 영화의 주인공이니 말이다.
- 옛날의 글쓰기 버릇이 잠깐 극명하게 드러났던 시간.
경험한 만큼 쓸 수 있다는 말은 정말 사실이다.
* 3월 6일 23시19분
다람쥐 바퀴 돌리듯, 똑같은 일상을 계속 반복하고 있으니
날짜관념이 희박해지며 하루를 3시간 단위로 나누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11시 30분에
잠들며, 시간을 넘기면 '수폐인 모드' 로 자동전환된다.
그리고 다음 날 6시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거리를 헤맨다. 더군다나 오늘같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우울청년 모드'로 돌입하여 하루종일 망상이 끓이지를 않는다.
아, 과연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들이 앞으로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모든 미래가 장미빛이지만은 않을터.
전과의 모범답안처럼 최선을 다해 달릴수 밖에. 모두에게 좋은 밤.
* 수폐인 모드
: PC폐인 8레벨에서의 업그레이드 패치로 '갑부201.exe' 과
'자취방103.exe'을 설치하면 레벨이 오버클럭 되며
보너스 파일로 '월하야상곡.mp3', '점심무렵기상.bmp'
파일이 생성됨.
* 우울청년 모드
: Daydreamer 모드의 확장팩인 Etherwalker 모드의 번외편.
'제살깍기.exe' 와 '상처소금치기.dat'로 이루어져 있음.
- 지인들과의 농담을 글로 옮겨봤던 것.
*3월29일 22시58분
어느덧 3월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더군다나 요즘은 너무나도 좋은 날들이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내일 새벽, 일을 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면 성급한 4월이
신문지를 두른 체 문 앞에 누워있지 않을까 하는 몽상이 들 정도로.
정말 그렇다면 나는 그날도 상쾌한 봄을 사뿐히 밟고
먼지와 가루의 향연으로 처절하게 굴러들어 갈게다.
이제 2003년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어제도 나는 2002를 휘갈기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루하루 봄날은 가고,
나도 갈길 바쁜 3월에게 작별의 인사를 미리 던졌다.
내일은 '벌써' 3월 30일인 게다.
- 잠깐 나타났던 글쓰기 성향. 느끼했다.
*4월 1일 00시 6분
잠자리에 잠시 누워 망중한을 즐기다가, 켜놓은 컴퓨터 탓에
의자에 앉았다. 웹 서핑에 몰두한 나머지, 상황을 알지는 못하지만
문득 뒤를 돌아보니 형광등이 달려있던 장식물이 통째로 배게위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면 아마도
비명횡사나 요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생명에 위협을 받았으리라.
하긴, 아직 24살이다. 철없던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꼭 29살에
얼어죽으리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해보고 싶은 것이 많으니
조금 더 살아야 겠다는 가치관을 주입하고 있다.
음, 그러고 보니 최근 구입한 일본의 요절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의
시선집을 며칠만에 도난당하고 말았다. 일터에서 틈틈이 애독하였는데
어느날 가방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무척 좌절했었지.
어린 약혼녀의 죽음을 감당하지 못해 떠나간 노발리스도 구하고
싶지만 절판인터라. 아, 이런.
행동의 변화에 따라 목숨을 구한 것에 놀라워하며 글을 쓰려 하였는데
이 무슨 주절거림이람. 그만둬야겠다. 모두에게 좋은 밤.
- 언제나 애용하는 주제다. 쓸데없이 일상을 나열하기.
*4월19일 01시24분
어느덧 시간은 궤도를 따라 충실히 흘러 벌써 이천삼년도
백구일째에 접어 들었고, 또한 (혹은 벌써) 사월도 반 이나
지나가버렸다. 글쎄, 곧 시험이 닥친다는 이야기를 먼 발치에서
계속 듣다보니 '반이나'라고 쓸수 밖에 없다. 혹시 여유와 이해로
가득차 있어 "사월도 반 밖에 가지 않았군" 이라고 중얼거릴수 있는
시간관념의 행복자가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나는 학생이 아닌 관계로 시험을 치루지는 않지만,
그 기운에 도취되고 나면 정말 뭐라도 하나 공부해야 할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틀 후부터 시험에 돌입할 예비역 동기들
그리고 극소수라 알고 있는 여성 동지들.
모두의 시험에 운'도' 함께 하길.
- 학생이 아닌 시절의 일이라 관조적 자세가 드러나있다. 그러나 반년후에는..
*5월 1일 16시24분
폭풍처럼 작업이 휘몰아치고 나면, 머릿속에 맴도는 숫자를 몰아내기
위해서라도 쓰디쓴 커피 한 잔이 필요하다. 괜히 눈에 띄는 장소에서
여유를 즐기다가는 근무태만의 공익근무요원으로 오해받기 쉬우며,
군필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한적한 장소를 찾는다.
멀리서 바이올린 연주가 들려오면 알지도 못하는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마치 음악감상의 대가라도 되는 양 멍해지곤 한다.
- 마산시립교향악단은 오늘부터 다시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저 빽빽거리는 관악기들만은 자제를 해주었으면 -
그리고 오늘부터 5월이 시작되어버린 것이다. 세월의 흐름을 서술하는
일은 커피를 마시는 내용만큼이나 진부한 주제가 되어버린 만큼 저 위의
제목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나의 작업환경이 바뀌었다.
세 명이 공유하던 넓은 공간을 독차지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나 이외에도 침대 여섯 개, 책상 세 개, 의자 다섯 개,
전화기 두 대, 스테플러 하나가 같이 있긴 하지만.
거기다가 개인 노트북에 인터넷까지 연결되어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칠층천의 성전이 아니련가. 뭐, 요약하자면 편히 놀고먹으며
돈벌고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5월이다. 5월. 따사로운 햇빛이 무척이나 눈부신.
- 직장을 옮긴 직후의 여유가 드러난다. 정말 저때는 여유밖에 없었지.
*6월30일 06시41분
아침이 밝았다. 열려 있는 창문의 방충망 사이로 모닝커피의
향이 밀려 들어온다. 그리고 창 밖엔 새벽부터 나를 괴롭히던
날개달린 수컷 개미들의 시체가 쌓여있다.
이놈들. 교미비행을 하려면 여왕개미에게로 날아야지
멀쩡한 방충망에 들이받으면 어쩌겠단 말이냐. 그렇다고 해도
목적을 이룬 것은 몇 놈 일까. 태어난 목적이 이것이고 생명을
다한 이 비행을 위해 살아가다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는 아직 비행의 목적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하다.
이렇게 전자파로 몸을 괴롭히고, 방탕의 칼을 휘둘러 시간의
목을 차례로 베어버렸다. 아, 목적없는 밤샘의 허무함이란,
저, 허리 터진 개미보다 부질없는 것 일지도.
- 망가져가는 글이 확 눈에 들어온다. 두 달 넘게 글을 두드리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고,
여름이 시작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도)긱스와 호나우도의 부상으로 선발투입된 그는 전.후반 85분을 소화했으며, 두 번의 찬스를 무산시켰다. 하지만, '산소탱크' 답게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볐다. 몇번의 볼 트래핑 미스와 좀 많은 듯한 백패스를 했지만, 데뷔전이니 감독과 현지팬들은 어느정도 만족한 모양이다.
프리미어리그를 접한 것은 작년이었고, 스콜스와 루니탓에 맨-유는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쩔수 없다. 박지성이 꾸준하게 나와 골을 터트려주기를 바랄 수 밖에.
저녁 8시. 어느사이에 어둠이 내린 거리로 폰과 3000원을 보유한체 집을 나섰다. 사무실을 정리한 이모부 회사에서 얻어온 에어컨디셔너만 가동하면 온 몸에서 발진이 나타나는 기괴한 현상때문에 낮의 햇빛과 열로 뜨거워진 집을 식히는 동안에는 어김없는 그리고 원치않는 외출이다.
양말도 없이 발은 집어넣은 신은 한동안 밑창을 계속 비벼오지만, 어느 순간부터 얌전해졌다. 터벅터벅 걸어 횡단보도 저 편의 대여점으로 향한다. 이미 주변 대여점에서 보통의 사람이 볼만한 DVD는 다 해치웠기 때문에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새로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미 .avi파일로 본적이 있는 '하나와 앨리스' 를 빌려 다시 오르막길을 내려온다. 남은 시간은 아직 1시간 32분. 동네의 유일하게 남은 오락실로 걸어들어가 500원을 다른 오브젝트들로 환원한다. 버츄어 스트라이커2 98버젼. 시간은 2분, 로즈타임도 페널티 셧아웃도 없는 난이도 극악의 오락실주인 수정판.
최초의 100원으로 첫 판에서 무승부, 다음의 100원으로 게임엔딩. 30분을 소모했다. 세 번째의 100원으로 이름모를 다른 축구게임. 네 번째의 100원으로 길티키어 이그젝스. 생전 처음해본 것이었지만, 다섯 스테이즈를 손쉽게 넘어가버렸다. ↓↘→ + A로 승승장구. 다섯 번째 100원으로 던젼즈 앤 드래곤즈 : 쉐도우 오브 미스타라 전사 플레이. 스틱이 먹지 않아 고블린들의 먹이감으로 놔둔체 그냥 일어서버렸다.
아직 1시간. 길 근처의 슈퍼에서 400원으로 녹차음료 한 캔. 그걸 들고 심야의 건달마냥 동네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산책한다. 동네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게 개축한 몇몇 주택을 유심히 살펴보다 사전정찰하는 도둑을 보는듯한 몇몇 아주머니들의 눈빛에 다시 공설운동장쪽으로 진입한다.
시원한 바람에 야구장을 두 바퀴 돌고, 줄넘기 하는 아가씨를 감상한후 바람에 걸음을 맡긴체 시간을 소모한다. 나도 모르게 십여년 전의 기억이 대화형식처럼 흘러나온다. 깡통을 산업쓰레기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돌아온다. 가로등 없는 길목만큼이나 머리도 마음도 어둠의 극치를 달린다.
훌륭히 미션을 완수하고 들어서는 현관문 너머로 느껴지는 기온의 이질감 만큼이나, 걷는다는 행동자체가 생경했던 저녁. 그리고 그동안 수없이 스쳐지나갔던 묵은 감성들이 날뛰는 여름날의 판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