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 어느사이에 어둠이 내린 거리로 폰과 3000원을 보유한체 집을 나섰다. 사무실을 정리한 이모부 회사에서 얻어온 에어컨디셔너만 가동하면 온 몸에서 발진이 나타나는 기괴한 현상때문에 낮의 햇빛과 열로 뜨거워진 집을 식히는 동안에는 어김없는 그리고 원치않는 외출이다.

양말도 없이 발은 집어넣은 신은 한동안 밑창을 계속 비벼오지만, 어느 순간부터 얌전해졌다. 터벅터벅 걸어 횡단보도 저 편의 대여점으로 향한다. 이미 주변 대여점에서 보통의 사람이 볼만한 DVD는 다 해치웠기 때문에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새로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미 .avi파일로 본적이 있는 '하나와 앨리스' 를 빌려 다시 오르막길을 내려온다. 남은 시간은 아직 1시간 32분. 동네의 유일하게 남은 오락실로 걸어들어가 500원을 다른 오브젝트들로 환원한다. 버츄어 스트라이커2 98버젼. 시간은 2분, 로즈타임도 페널티 셧아웃도 없는 난이도 극악의 오락실주인 수정판.

최초의 100원으로 첫 판에서 무승부, 다음의 100원으로 게임엔딩. 30분을 소모했다. 세 번째의 100원으로 이름모를 다른 축구게임. 네 번째의 100원으로 길티키어 이그젝스. 생전 처음해본 것이었지만, 다섯 스테이즈를 손쉽게 넘어가버렸다. ↓↘→ + A로 승승장구. 다섯 번째 100원으로 던젼즈 앤 드래곤즈 : 쉐도우 오브 미스타라 전사 플레이. 스틱이 먹지 않아 고블린들의 먹이감으로 놔둔체 그냥 일어서버렸다.

아직 1시간. 길 근처의 슈퍼에서 400원으로 녹차음료 한 캔. 그걸 들고 심야의 건달마냥 동네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산책한다. 동네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게 개축한 몇몇 주택을 유심히 살펴보다 사전정찰하는 도둑을 보는듯한 몇몇 아주머니들의 눈빛에 다시 공설운동장쪽으로 진입한다.

시원한 바람에 야구장을 두 바퀴 돌고, 줄넘기 하는 아가씨를 감상한후 바람에 걸음을 맡긴체 시간을 소모한다. 나도 모르게 십여년 전의 기억이 대화형식처럼 흘러나온다. 깡통을 산업쓰레기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돌아온다. 가로등 없는 길목만큼이나 머리도 마음도 어둠의 극치를 달린다.

훌륭히 미션을 완수하고 들어서는 현관문 너머로 느껴지는 기온의 이질감 만큼이나, 걷는다는 행동자체가 생경했던 저녁. 그리고 그동안 수없이 스쳐지나갔던 묵은 감성들이 날뛰는 여름날의 판타지.
Posted by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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