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사랑과 지하철
잡담/독백 2006. 6. 29. 15:44 |여느때와 같이 지하철 2호선을 이용해 숙소로 돌아오던 오후 10시.
신림이나 신도림 구간을 지나면 대부분의 승객이 잠시지만 빠져나가기 때문에 목적지인 역삼까지는 높은 확률로 앉아서 올 수 있다. 그날도 문 바로 옆의 팔걸이가 있는 자리에 왼쪽 팔을 걸치고 앉아 요즘 다시 완독에 도전하는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점점 다가가고 있을 무렵 갑자기 옆자리의 여성이 전화기에 대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긁는느낌에다가 어투조차 퉁명스러워 잠시 신경이 쓰인 후 다시 책에 집중하려는 찰나 문득 그 말하는 내용이 머리속에 살며시 들어왔다. 그녀는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에게 왜 문자를 무시하며 전화기를 꺼놓는지를 따지고 있었다.
아마도 남자친구겠거니 하는 생각이 문득 그리고 당연히 들었다. 그리고 어떤 여자가 자신에게 보낸 문자의 내용 - 고맙다. 그를 행복하게 해주겠다 - 를 상대방에게 추궁하고 있었다. 그런 대화는 역을 두어개 더 지나는 동안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미 책의 내용에 대한 관심이 은하너머로 날아가버린 나는 호기심에게 승리의 깃발을 쥐어주고는 무례함과 사생활 침해의 영역으로 계속 걸어들어가고 있었고, 머릿속에는 일방적인 한쪽의 통화내용만으로 옆자리의 여성과 상대방 그리고 제3의 여인에 대한 - 누구나 할만한 뻔한 자유연상이 시작되었다.
통화를 일방적으로 종료한 그녀는 손으로 두어번 눈끝을 훔치고는 다시 침묵하기 시작했고 드 보통의 책은 사랑과 자유주의 그리고 플라톤과 칸트적 사랑에 대해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목적지가 다가왔다. 책을 가방에 넣고 일어선 나는 차량을 나서기 전 잠깐 뒤돌아 그녀를 살며시 보았다. 어딘가의 누군가와 통화를 다시 하고 있었다. 지금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서클렌즈 탓에 과도하게 확장된 눈동자.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지에 대해 읽고 있던 나는, 책의 부분과 동일한 사랑의 위기 혹은 종료 그리고 어떤 순간들을 귀로 들으며 그 순간에만 설명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 묘한 느낌을 두른체 계단을 걸어올라왔다. 그대로 걸어서 숙소까지 가는 내내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걸 알아보려고 근무태만의 한 행위를 저지르며 어제의 순간을 오늘 두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