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ノルウェイの森, 2011
유희/영화 2011. 4. 24. 17:04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아는 유명한 하루키의 소설을 영상화한 작품. 몇 년전 1Q84로 다시 한번 붐을 일으켰으니 국내에도 여전히 팬은 많은 것 같다. 상실의 시대가 영화로 나온다는 소식은 오래 전에 들은 것 같은데 일단 국내 개봉은 올해에 했다. 원작자인 하루키가 영상물로 나오는 것에 계속 반대를 해서 이번에 힘겹게 허락을 득했다고 하는 광고같은 소문이 있다.
아주 예전이지만 어느 작가의 소설 후기에서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언급하며 배우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한 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도저히 이미 흐려진 기억이 어디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작가의 희망사항이 내 기억 속에서 왜곡된 것 일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최초의 영화화.
보고왔으니 감상을 좀 적어보자. 소설 속 인물들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배우들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대단한 미스캐스팅이라 생각된다. 애초에 본인이 배우들의 극중 역할에 대한 정보를 조금 잘 못 알고 간 것에 의한 간극도 있지만 말이지.
주인공 와타나베 - 이 배우도 제법 나이가 있지만 그래도 얼굴이 좀 어려보이는 편이라 19살을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그런데 뭔가 평범하다. 좀 더 허무하고 처연하고 그런 표정이 없다. 거의 라스트 신을 제외하고는 같은 표정..
나오코 - 30대 배우가 스무 살을 연기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거기다 남자배우가 더 곱상하게 느껴질 정도면 어쩌라는 거야. 또 원작에서 받은 캐릭터의 느낌은 하나도 없고 그저 광기어린 여자가 하나 있더라. 첫 장면에서 배우를 보는 순간 딱 든 생각이..' 와, 이 여자 눈 풀려있다..' 상영 내내 뭔가 찜찜했다. 나오코에 대한 연민은 커녕 짜증이 솟구치는 캐릭터. 어디선가 본 배우라 생각했는데 예전 '바벨'에서도 애정결핍인 기분 나쁜 역할로 나왔다. 연기는 잘하는 것 같은데... 너무 극단적으로 간듯.
미도리 - 한 세,네 장면 카메라의 각도와 조명의 힘에 의해 잘 나온 컷을 빼고는 실망이 컸다. 찾아보니 미국계 일본인이라는데 처음 봤을때는 감독의 나라인 베트남에서 데려온 사람인 줄 알았다. 극중 출연장면이 적다보니 캐릭터도 잘 드러나지 않은 편. 원작에 있는 서점 2층에서의 장면도 생략되었고. 배우는 그냥 책을 읽는다...
레이코 - 줄담배를 피며 기타를 연주하고 남자같이 이야기하는 좀 늙었으나 멋진 아줌마를 연상했으나, 평범 그 자체. 나오코를 추모하는 애절한 정사씬도 망한 장면.. 원작에 나온 주름드립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쿨한 대사였는데 역시 나오지 않았다.
나가사와 선배 - 위대한 개츠비는 언급되지 않는다. 죽은 지 30년이 지난 작가의 책 대사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시간의 세례라는 단어가 등장할 뿐. 배우는 이 곳 저 곳에서 몇 번 본 잘생긴 배우.
하츠미 - 이 영화 유일하게 눈이 정화되는 장면 제공. 그녀와 와타나베가 택시 안 에서 주고받는 대화.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오는 얼굴 근접 풀 샷.. 약간 똘망똘망 이미지 + 신비감이 있어서 이 배우가 주연 두 명 중에 한명도 어울렸을 것 같은데.
初音映莉子, 젊은 시절 사진.
모 옹이 기대한 '돌격대'는 대사 약 두 마디, 출연 세 장면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생략. 라디오 체조도 나오지 않고 그냥 언급만 된다.
영화감독... 평소 보던 일본영화들은 좀 정적인 것들이 많아서 이 작품도 그런 것을 생각 했는데 불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베트남 감독이라 그런지 기존 일본영화에 대한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장면, 장면들은 정말 때깔나게 뽑았는데 배경음악을 왜 그렇게 깔아대는지 나중에는 짜증이 날 정도. 몰입을 도와주는 배경음악이 아니라 몰입을 방해하는 것 같다. 이게 분리되어서 생각날 정도면 그야말로 장면에서 붕 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스토리.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이상한 영화 한 편 보고 온 것 처럼 될 듯. 소설의 장면들을 잘라서 넣다보니 캐릭터가 장면마다 널을 뛴다. 원작을 본 사람들이야 아, 그래서 저렇겠지 하겠지만.. 그렇다고 장면의 분포가 잘 이루어져 있나하면 그것도 아니다.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나오는 쓸데없다 싶은 장면이 너무 많다.
마지막 장면과 대사도 조금 어설프다. 주인공이 내적방황을 끝내고 그나마 빛이 비치는 곳에 있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인데.. 원작대로 공중전화 부스도 아니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마지막 대사도 책 읽는 듯이 지나간다.
이하는 원작자인 하루키의 감상
일전에 트란안홍 감독이 만든 영화의 시사회에 다녀왔는데, 그걸 보면서도 아, 이건 역시 '나'가 다양한 풍경과 사건을 통과해가는
이야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중략) 영화화된 것을 보고 <노르웨이의 숲>은 여자가 중심이 된 이야기였다는 걸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 소설을 쓸 때는 일인칭 남자의 시선이었기 때문에, 이건 기본적으로 와타나베 도오루라는 한 남자의
편력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그런데 영화를 보니까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겠더군요. 미도리와
나오코와 레이코, 그리고 나가사와를 좋아하는 하쓰미. 이 네 여자의 이야기였어요. 이 여성들의 존재에 비하면 주인공까지 포함하여
남자들의 존재는 오히려 희미합니다.
하아, 오늘 이 영화를 기억에 담은 것을 생각하면, 나오코와 미도리 때문에 자다가 벌떡 일어날듯.. 진짜 이 감독..로또되면 찾아간다. 이 영화를 씹으면서 소주 두 병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아! 딱 하나 좋다고 생각되는 장면이 있다. 교토(극중)의 겨울 산. 이 장면을 보고 겨울산이 정말 좋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했다. 최근 등산이 부실 한것도 봄,여름의 산에 재미를 못느껴서가 아닐까 하고 자신의 마음을 추측해본다.
두 번 읽어보았고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2001년인 상실의 시대. 지금도 본가에 가면 1999년 부터 모은 하루키 컬렉션들이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그땐 왜 그렇게 이 사람의 소설이 재미가 있었을까. 지금은 완전히 시들해졌는데'..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로 인해 가라앉아 있던 과거의 흥취가 약간 수면 위로 올라왔다. 다음에 내려가면 상실의 시대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이 기분 나쁜 감각을 세척 해야지..
2011년 04월 24일(일) 11시 00분.
씨너스 강남 6관 E11